공은 둥글고, 결국 맨 아래로 굴러옴

월요일 아침 9시 4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알았음. 오늘은 공이 굴러오는 날임.

최부장이 사무실 한가운데 서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네, 상무님. 네네, 그럼요. 당연하죠.”를 반복하고 있었음. 최부장의 “당연하죠”는 경험상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단어임. 그 말이 나오면 반드시 누군가의 주말이 사라짐.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체로 부장 본인이 아님.

전화를 끊은 최부장은 잠시 창밖을 바라봤음. 고뇌하는 리더의 옆모습이었음. 3초쯤 지나자 고개를 돌려 정확히 한 사람을 불렀음.

“오차장, 잠깐 나 좀 봐.”

사건의 시작은 지난 토요일 골프장이었다고 함. 정상무가 대표님과 라운딩을 하다가 9번 홀쯤에서 “저희 쪽에서 협력사 전체 단가를 한눈에 보는 대시보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버린 거임. 준비하고 있지 않았음. 그런 계획은 이 회사 어디에도 없었음. 하지만 대표님은 “오, 좋네. 다음 주 임원회의 때 한번 봅시다.”라고 했고, 정상무는 “물론입니다”라고 했음. 버디는 못 했지만 말은 이미 홀컵에 들어가버린 상황임.

그렇게 상무의 입에서 나온 공이 부장의 책상으로 떨어졌음. 그리고 부장의 책상은 경사가 져 있었음.

오차장은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텀블러를 들고 탕비실로 갔음. 오차장은 늘 그런 식임. 일단 커피부터 내림. 원두는 본인이 직접 가져온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임.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산미가 좀 있어야 머리가 돌아가거든”이라고 말함. 그리고 그 머리로 가장 먼저 생각해낸 건 언제나 “이거 누구한테 넘기지?”임.

“박과장, 이거 우리 팀 데이터랑 연결되는 거 알지? 박과장이 원래 단가 쪽 제일 잘 알잖아.”

제일 잘 안다는 말은 칭찬이 아님. 이 회사에서 그 말은 ‘네가 해’의 존댓말임.

박과장은 2초 동안 웃었음. 웃는 얼굴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음. “차장님, 저 이번 주 협력사 실사 두 건이 잡혀 있어서요.”

“아 그래? 그럼 실사는 실사대로 하고, 이건 큰 틀만 잡아줘. 디테일은 밑에서 하면 되니까.”

밑에서. 그 ‘밑’이 어디인지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음. 그 순간 박과장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모니터 쪽으로 돌아왔음.

나는 윤대리임. 입사 4년 차. 이 회사에서 공이 굴러가다 멈추는 지점, 그러니까 경사의 가장 아래에 사는 사람임.

“윤대리,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있었음. 엄마 생신이었음. 하지만 그 질문은 질문이 아니었음. 이 회사에서 “약속 있어?”는 약속을 취소할 시간을 주는 배려에 가까운 문장임.

그날 밤 나는 협력사 412곳의 3년 치 단가 파일을 열었음. 엑셀 시트 이름은 ‘최종’, ‘최종_수정’, ‘최종_진짜최종’, ‘최종_진짜최종_부장님확인’이었음. 그중 어떤 게 진짜인지는 만든 사람도 퇴사해서 아무도 모름. 엄마한테는 케이크 사진만 받았음. “바쁘지? 밥은 꼭 챙겨 먹어.” 밥 대신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었음. 참치마요였음.

화요일 아침, 오차장이 내 자리로 왔음. 진행 상황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음.

“음, 이게 좀 촌스럽네. 내가 MBA 때 봤던 맥킨지 리포트들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거든. 좀 더 인사이트풀하게 할 수 없나?”

인사이트풀. 오차장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임. 그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오차장도 설명한 적이 없음. 다만 그 단어가 나오면 모든 차트의 색을 바꿔야 한다는 건 확실함.

그 와중에 한팀장은 보이지 않았음. 우리 팀의 팀장임. 원래는 이 모든 걸 조율해야 하는 사람임. 메신저 상태는 ‘외근’이었고 캘린더에는 ‘전략 미팅’이라고만 적혀 있었음. 한팀장의 전략 미팅은 신기하게도 늘 일이 터지는 날에만 잡힘. 그리고 일이 수습되는 날 정확히 복귀함. 거의 기상 레이더 수준의 감각임.

수요일. 정상무가 직접 층에 내려왔음. 드문 일임. 상무가 내려오면 사무실 공기의 밀도가 달라짐. 모두가 동시에 엑셀을 띄우고, 모두가 동시에 진지해짐.

“이거 어떻게 돼가?”

최부장이 반 발짝 앞으로 나섰음. “네, 상무님. 저희 팀에서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희 팀. 그 순간 최부장은 월요일 이후 처음으로 이 일에 소속감을 느낀 것 같았음.

정상무는 화면을 잠깐 보더니 말했음. “근데 이거, 협력사별로 말고 품목별로 보는 게 낫지 않나? 대표님은 큰 그림을 좋아하시거든.”

3일 동안 협력사별로 만든 거였음. 정상무는 그 말을 남기고 “수고들 해”라는 짧은 격려와 함께 올라갔음. 향수 냄새가 꽤 오래 남았음. 아마 그것도 비싼 거였을 거임.

최부장은 오차장을 봤고, 오차장은 박과장을 봤고, 박과장은 나를 봤음. 시선이 계단처럼 아래로 내려왔음. 나는 볼 사람이 없어서 모니터를 봤음.

목요일 밤 11시 40분. 사무실에는 나랑 박과장만 남았음. 박과장은 실사에서 돌아와 넥타이를 반쯤 푼 채 내 옆에 앉았음.

“윤대리, 미안하다. 나도 위에서 받은 거라.”

알고 있었음. 박과장도 공을 받은 사람임. 다만 나보다 한 칸 위에서 받았을 뿐임. 박과장은 편의점에서 사 온 바나나우유를 하나 건넸음. 이 회사에서 그게 사과의 가장 진심 어린 형태임.

금요일 오후 4시, 대시보드가 완성됐음. 품목별로, 인사이트풀하게, 큰 그림으로.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둥근 공이었음.

보고는 최부장이 했음. 정확히는, 최부장이 오차장이 정리한 장표를 들고 정상무에게 했고, 정상무가 그걸 다음 주 임원회의에서 대표님께 할 예정이라고 했음. 그 과정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음. 장표 맨 아래 작성자 칸에는 ‘경영관리팀’이라고만 적혀 있었음. 공정하다면 공정함. 나도 경영관리팀이긴 하니까.

그리고 그날 오후 5시 58분, 한팀장이 복귀했음.

“다들 고생 많았어. 내가 위에 얘기 잘 해놨어.”

무엇을 잘 얘기해놨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음. 물어봐야 답이 없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임.

다음 주 화요일, 임원회의가 끝나고 소식이 내려왔음.

대표님이 대시보드를 보더니 “이거 좋은데, 그냥 엑셀로 한 장 뽑아줘요. 난 이런 화면은 잘 안 봐서.”라고 했다고 함.

그 말 한마디가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왔음. 정상무에서 최부장으로, 최부장에서 오차장으로, 오차장에서 박과장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한테.

“윤대리, 이거 엑셀 한 장으로 요약 좀 해줄 수 있지? 오늘 중으로.”

할 수 있었음. 그건 30분이면 되는 일이었음. 처음부터 그랬으면 30분이면 됐을 일이었음.

나는 ‘최종_진짜최종_대표님용.xlsx’라는 파일을 저장했음. 그리고 생각했음. 이 회사에서 공은 늘 둥글게 만들어지지만, 굴러가는 방향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언젠가 저 위의 누군가도, 한때는 이 맨 아래 자리에서 바나나우유를 받아 마셨을 거라고.

그게 위로가 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음. 그냥, 오늘은 엄마한테 전화나 한 통 드려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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