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야근임. 시계는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사무실 불빛만이 텅 빈 건물을 홀로 밝히고 있었음. 캠페인 제안서 마감은 사흘 뒤임. 팀원 열 명이 매달려 있는 이 프로젝트, 이름하여 ‘하반기 통합 브랜드 리런칭 캠페인 기획안’임.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름임.
나는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음. 눈이 빠질 것 같은 느낌임.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커피임. 위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손은 이미 네 번째 캔을 집어 들고 있었음.
문제는 간단했음. 김과장이 맡은 소비자 조사 분석 파트 때문임. 그게 없으면 내가 며칠 밤을 갈아 넣어 작성한 타깃 전략 기획서는 그냥 텅 빈 껍데기일 뿐임. 근거도 없고, 데이터도 없고, 아무 설득력도 없는 문서임.
김과장은 오후 여섯 시에 퇴근했음. “어, 나 파트는 다 끝났어요.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하면 되죠, 뭐.” 라고 말하며 재킷을 챙겼음. 그때만 해도 설마 했음. 설마 소비자 분석이 끝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음. 직접 확인해보니 역시나였음. 기본 설문 결과 요약본 몇 장만 첨부해놓고 끝냈다고 선언한 것임.
그리고 그때부터 김과장의 전설이 시작됐음. 카카오톡 팀 채널에 메시지가 올라왔음.
“다들 수고 많으심. 저는 제 파트 완료했고요, 혹시 전체 일정 딜레이 나면 다른 파트 이슈 확인해보세요. 저는 클리어임.”
화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음. 클리어. 그 단어가 뇌리에 박혔음. 저 사람 눈에는 자기 파트만 보이는 것임. 팀 전체 기획안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건 관심 없는 것임.
다음 날 오전 팀 전체 회의임. 오차장이 진행 상황을 점검했음. 슬라이드를 넘기며 각 파트 완성도를 확인하는 자리임.
“이과장, 타깃 전략 파트 상태는요?”
“소비자 분석 데이터가 아직 정리가 안 돼서 타깃 근거 자료가 연결이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순간 김과장이 끼어들었음. 표정은 놀랍도록 태연했음.
“아, 제 파트는 끝났는데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조사 데이터는 제가 다 공유했고, 혹시 문제가 있다면 전략 기획 쪽에서 정리가 안 된 거 아닐까요?”
회의실에 잠깐 침묵이 흘렀음. 나는 숨을 들이켰음. 전략 기획은 내 파트임. 그러니까 지금 김과장은 자기 분석 파트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기획 정리를 제대로 못 한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임.
오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음. “이과장, 전략 파트 이슈예요?”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음. “전략 기획 자체는 완성됐습니다. 다만 소비자 분석 데이터의 세그먼트 기준이 처음 기획 브리프와 달라서 타깃 설정 근거가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김과장 파트에서 수정이 필요합니다.”
김과장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음. “그건 제가 처음 들어보는 얘긴데요? 브리프대로 분석했는데요.”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었음. 어쩌면 김과장은 진짜로 처음 공유된 브리프대로만 했을 것임. 브리프 자체가 중간에 수정된 것임. 그 사실을 김과장이 몰랐거나, 알면서 무시했거나.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음. 지금 기획안이 완성이 안 된다는 것임.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음. 오차장은 “오늘 중으로 해결 방안 공유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음.
복도에서 나 혼자 서 있었음. 분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허탈함이 더 컸음. 프로젝트라는 게 이런 것임을 이제는 알 것 같았음. 누군가는 자기 몫만 채우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것임. 그리고 그게 늦어지면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털고 나오는 것임.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문서를 열었음. 결국 내가 해결해야 프로젝트가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음. 감정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었음. 브리프 변경 내역을 뒤졌음. 변경 사항을 파악하고, 세그먼트 기준을 재정리했음. 밥도 거른 채 화면만 들여다봤음.
저녁 무렵, 드디어 타깃 근거 데이터가 전략 기획안과 맞아떨어졌음. 숫자들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오는 순간이었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음. 홀가분하지 않았음. 뿌듯함도 별로 없었음. 그냥 다행이라는 감정만 남았음.
카카오톡 채널에는 그 사이 김과장의 메시지가 또 올라와 있었음.
“오늘 일정 차질 없이 가고 있죠? 저는 내일 광고주 사전 미팅 준비 때문에 자리 비울 수 있어요. 다들 파이팅.”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그게 더 나을 것 같았음.
마감 하루 전, 팀 전체가 최종 검토를 마쳤음. 오차장은 “수고 많았다”며 악수를 청했음. 담담하게 받았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임. 광고주 미팅에서 김과장은 이번 캠페인 기획의 전략적 리드로 자신을 소개했다고 했음. 소비자 세그먼트 구조를 자신이 설계했다고 설명했다고 들었음.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던 동료가 조용히 귀띔해줬음.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 창밖을 봤음. 하늘은 맑았음.
마케팅 기획이라는 일이 이런 것임을 이제는 조금 더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내 기획을 완성하는 것이 능력의 전부가 아님을 알겠음. 누가 무엇을 했는지, 누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그 사이에서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임을 이제야 알겠음.
너무 늦게 깨달았음. 하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