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임원님과의 하루

오늘도 어김없이 긴 하루가 시작되었음.

회의실 문이 열리고 고객사 임원, 그러니까 모두가 속으로 “또 오셨네”라고 생각하는 그 K 상무님이 들어오셨음. 자료 더미를 테이블에 탁 내려놓으시며 “자, 오늘 제대로 한번 봅시다”라고 하셨음. 다들 자세를 고쳐 앉았음.

오전 열 시. 리뷰가 시작되었음. 첫 번째 슬라이드를 보시더니 “이 방향이 맞아요, 이렇게 가야 해”라고 하셨음. 우리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적었음. 좋은 신호처럼 보였음.

열한 시. 다섯 번째 슬라이드쯤 됐을까. 상무님이 갑자기 “이게 뭐예요? 왜 이 방향으로 간 거예요?”라고 하셨음. 분명히 한 시간 전에 본인이 이 방향이 맞다고 하셨음.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음. 그냥 “네,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만 했음.

낮 열두 시. 점심도 못 먹고 계속되었음. “못 알아쳐먹겠어요, 이걸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니네들 이거 기본도 모르는 거예요?”라는 말씀이 나왔음. 그런데 이상한 건, 본인이 조금 전에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거임. 사무실 공기가 잠시 정지된 것 같았음. 모두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음.

오후 한 시. 상무님의 말씀은 계속 흘러갔음. 처음엔 A라고 하셨고, 그 다음엔 B라고 하셨고, 다시 A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C에 가까운 무언가를 말씀하셨음. 강 대리는 노트에 무언가를 적다가 멈췄음. 뭘 적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음. 다들 그 심정이었음.

오후 두 시. 갑자기 상무님이 “자, 다 알겠죠? 이 방향으로 잘 해봐요”라고 하셨음. 그리고는 자료를 챙겨 일어나셨음. “수고들 해요”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문을 닫으셨음.

회의실에는 침묵이 흘렀음. 정확히 두 박자 정도의 침묵이었음.

그 다음, 눈짓이 오고 갔음. 팀장님과 강 대리가 눈을 마주쳤음. 이 과장도 슬쩍 옆을 돌아봤음. 말은 없었음. 아무것도 없었음. 그런데 모두 알았음. 끝났다는 것을. 그 몇 시간의 고문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을.

누군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음. 그걸 보고 또 다른 누군가의 입꼬리도 따라 올라갔음. 웃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슬픔도 아닌, 오직 직장인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묘한 해방감이었음.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팀장님이 조용히 물으셨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음. 왜냐하면 아무도 몰랐음. 상무님 본인도 모르셨을 거임. 그냥 다음 회의까지 각자 알아서 하는 방향으로 정리가 된 것임.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흘렀음. 뭔가를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한 것 같기도 한 그런 하루였음. 퇴근 시간이 되자 다들 말없이 자리를 정리했음. 내일 또 이런 하루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퇴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음.

직장이란 그런 곳임.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어쨌든 같이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곳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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