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요청이 왔음.
메일 한 통. 오전 9시 12분.
보낸 사람은 옆 팀 김 과장임.
“혹시 이거 오늘 오후까지 가능할까요?”
혹시, 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서 거절하기 더 애매한 요청임.
백 오피스라는 곳이 다 그런 곳임.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드는 팀이 아니라, 뒤에서 받쳐주는 팀임.
그래서 요청이 끊이지 않음.
“이거 좀 처리해줄 수 있어요?” “이 데이터 뽑는 거 어렵지 않죠?” “급한 건 아닌데, 오늘 중으로 부탁드려요.”
급한 건 아닌데, 오늘 중으로.
이 두 말이 동시에 성립하는 게 백 오피스 세계의 문법임.
오전에 받은 요청 하나 처리하고 나니, 점심때쯤 또 하나 들어왔음.
이번엔 경영지원팀임.
지난달 자료를 다시 포맷 바꿔서 달라는 거임.
이미 한 번 만들어서 공유했던 자료임.
그 사람이 직접 수정할 수 있는 파일로 넘겼던 거임.
근데 다시 요청이 옴.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다시 만들어 주는 게 빠를 것 같아서 또 만들었음.
그게 백 오피스 사람의 현실임.
거절 한 번 잘못했다가 관계가 틀어지는 것보다, 그냥 해주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게 됨.
오후 4시쯤, 원래 내가 오늘 처리해야 했던 일을 겨우 시작했음.
내 일이 아닌 것들을 하느라 내 일은 저녁이 다 돼서야 손을 댄 거임.
퇴근 시간이 지났음.
팀장은 이미 나갔음.
나한테 요청했던 사람들도 다 퇴근했음.
혼자 남아서 마무리하고 있음.
서운한 건 아님.
화가 나는 것도 아님.
그냥 좀 쓸쓸한 거임.
백 오피스에서 일한다는 건, 결과물이 완성되는 순간 내 이름은 사라지는 구조임.
누군가 발표하고 성과를 가져갈 때, 그 뒤에서 데이터 정리하고 자료 만들었던 건 나였음.
근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음.
요청을 받는 사람은 늘 뒤에 있음.
앞에 나서는 사람이 빛나는 동안,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은 그냥 조용히 일하고 조용히 퇴근함.
오늘 같은 날은 그 조용함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날임.
그래도 내일 또 출근할 거임.
요청이 또 올 거고, 또 처리할 거임.
그게 백 오피스 직장인의 하루임.
슬프냐고 물어보면, 슬프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좀 그런 하루임.